1. 드라마 소개 :
1996년 11월 24일부터 1998년 5월 31일까지 159부작 방송되었던 용의 눈물은 매주 주말 밤 9시 45분 방영 당시에 엄청 높은 시청률과 국내 정치에까지 큰 영향을 줄 만큼 대단한 대하 사극이었습니다.
대한민국 사극 중에서 가장 명작 사극을 꼽으라면 절대 빠지지 않는 사극이 바로 용의 눈물입니다.
방영이 끝난 25년이 지났지만 지금도 재방송이나 다시 보기 높은 순위에 올라가 있습니다.
2. 원작과 회차
원작품은 박종화의 소설 [세종대왕]입니다. 그러나 드라마 용의 눈물은 세종 대왕의 역할의 비중은 거의 없고, 조선 건국을 다룬 태종 이방원이 주된 주인공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원래 용의 눈물은 100회까지 방영하려고 했으나 인기가 너무 많아 59회나 연장을 하여 159회로 끝을 내게 됩니다.
3. 제작 비화
90년대 당시에 사극에100억 원대를 투입하는 작품들은 거의 없었는데 총 160억 원의 제작비가 투입이 되었습니다.
제작비 중에서도 의상에 대해서는 KBS 방송국 소품실에 있던 의상을 쓰지 않고 의상 제작비에만 10억 원을 쓰는 등
그 시대 의상의 사실적 고증을 담아내려 굉장히 신경을 썼습니다.
이 사극에 출연한 출연진만 해도8천 명이었고 엑스트라까지 다 합치면 5만 명 정도가 투입이 되었다고 합니다.
4. 같은 시대의 세계 역사의 흐름
(1) 동아시아
중국 명나라(1368~1644)는 조선의 주요 문화적, 정치적 영향을 미쳤습니다. 명나라는 몽고가 주도한 원나라를 무너뜨린 뒤 안정을 취하고 있었고, 조선 통치에 큰 영향을 미친 유교를 강조했습니다.
일본은 무로마치 시대(1336~1573)였으며, 봉건 갈등과 강력한 군벌(다이묘)의 등장으로 특징지어졌습니다. 조선과 일본은 외교적으로 교전했지만 조선 해안선을 따라 일본의 해적(와코)이 습격하면서 긴장이 고조되었습니다.
(2) 유럽:
르네상스(14~17세기)는 특히 이탈리아에서 번성했습니다. 예술, 과학, 문학의 혁신은 현대 서구 문명의 토대를 마련했습니다.
영국과 프랑스 사이의 100년 전쟁(1337~1453)이 거의 종결되고 있었고, 이는 유럽의 권력 역학에 변화를 가져왔습니다.
(3) 이슬람 세계:
오스만 제국은 술탄 바예지드 1세와 나중에는 1453년에 콘스탄티노플을 점령한 정복자 메흐메드 치하에서 확장되고 있었습니다.
중앙아시아에서는 타메를 라네(Tamerlane)가 통치하는 티무르 제국(Timurid Empire)이 치열한 군사 작전과 문화적 번영을 겪은 후 쇠퇴하고 있었습니다.
(4) 아메리카:
메소아메리카의 아즈텍, 남아메리카의 잉카와 같은 문명은 번성했지만 여전히 아프리카-유라시아의 발전으로부터 고립되어 있었습니다.
(5) 스페인과 포르투갈:
포르투갈과 스페인은 탐험의 시대를 시작했습니다. 15세기 항해사 헨리 왕자의 노력은 유럽의 세계적 팽창의 토대를 마련했습니다.
5. 드라마 [용의 눈물]을 통해 본 세계 역사에서 조선의 중요성
조선(1392~1897)은 이성계(태조)가 세운 고려 왕조의 폐허 위에 세워진 유교 국가였습니다. 왕조는 행정 개혁, 유교 이상 장려, 문화, 과학 및 기술의 획기적인 발전을 특징으로 하는 새로운 통치 시대를 열었습니다.
조선은 세계 해양 탐험이나 군사 정복에 직접 참여하지는 않았지만 동아시아에서의 전략적 위치로 인해 중국과 일본을 잇는 문화적 가교 역할을 했습니다. 학문과 통치에 대한 유교적 강조는 유럽과 이슬람 세계의 더욱 격동적인 발전과 대조되는 동아시아의 안정에 기여했습니다.
드라마 [용의 눈물]에 묘사된 조선의 초기 역사는 대내외적 어려움 속에서도 통일되고 윤리적인 국가를 구축하려는 의지를 보여줍니다. 이 드라마는 세계 역사상 가장 오래 지속되는 왕조 중 하나를 세우는 데 필요한 희생과 투쟁에 대한 친밀한 시각을 제공합니다. 동시에 조선의 교육, 도덕, 통치의 가치가 14~15세기 세계적 흐름과 어떻게 부합하거나 다른지 돌아보게 됩니다.
조선의 시작은 비록 형제와 많은 피들의 희생으로 잔혹 하게 시직 되었지만, 또한 능력주의와 유교적 가치에 기초한 관료 체제를 확립하면서 안정되고 번영하는 왕조를 이루었습니다. 이 시스템은 한글 창제와 같은 혁신으로 알려진 세종대왕 치하에서 종종 한국의"황금시대"라고 불리는 시대의 토대를 마련했습니다.